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토 히로부미 (문단 편집) == 1차 시도 ==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조약]]을 하고 얼마 후 수원에 놀러 갔다. 정확히는 사냥[* 지금도 그렇지만 사냥은 유럽에서는 상류층의 여가 활동이자 스포츠이다. 아마 이토가 유럽에서 이런 문화를 보고 배웠을 가능성이 높다.]을 하러 갔다. 이 와중에 안양에 사는 농부인 [[원태우]]라는 사람이 있었다. 원태우는 조국을 도적질한 이토 히로부미와 조국을 몰수당하게 만든 을사조약에 대단한 분노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토 히로부미가 수원으로 놀러 갔다 돌아 온다는 사실을 알아내자 안양에서 매복해 있다가 열차 레일에 바위를 걸쳐서 열차를 전복시키려 했다. 하지만 거사가 시작되기 전, 이토가 타고 있는 열차가 오는 것이 목격되자 동료 중 하나가 겁을 먹고 바위를 치우는 바람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나 싶었다. 그럼에도 원태우는 돌을 집어서 그걸로 이토를 향해 힘껏 던졌다. 서리재 고개에서 돌을 던져 맞혔고, 짱돌은 유리창을 깨고 이토의 마빡에 정확하게 헤드샷 되었다. 이 때 깨진 유리조각도 같이 이토의 얼굴에 무려 8조각이나 박혔다. 이토는 [[뇌진탕]]을 일으켰으나 동승하고 있던 주치의가 응급조치를 해서 살아났다. 돌 던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 조선시대의 평민들은 [[석전]]이라는 돌 던지기 싸움 놀이를 심심찮게 했었다. 원태우는 바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온 몸을 상처로 도배하다시피 하여 불구가 되었다. 이때 원태우는 너무 모질게 고문을 당하는 바람에 정말로 [[고자|성불구]]까지 되어서 후사를 남길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이후 일경들에게 시종일관 감시를 당하며 외롭게 살다, '''다행히 대한독립을 보고''' 1950년 시흥군 안양읍 비산리 수푸루지(현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에 민족끼리 피를 흘리는 [[한국전쟁|전쟁]]을 보셨으면 통탄하셨을거다. 암살이 미수에 그쳐 [[안중근]] 의사에 비해 인지도는 떨어진다. 이 사람의 모습이 어땠는가는 [[안양역]] 1번 출구에 가면 모습을 새긴 동판이 있다. 그런데 그 동판이 역으로 통하는 에스컬레이터 한가운데 있는데다가 제법 멀리 있어서 동판에 새겨진 글귀 읽기도 쉽지 않고 누군지 이름 읽기도 어렵다. 안양 사는 사람 대부분이 그냥 장식인지 누군가를 기리기 위한 동판인지 전혀 모른다. 게다가 원래 농부인데 동판엔 갓을 쓴 선비의 모습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